홍콩 가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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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 가봤니

홍콩 가봤니

1화

웹소설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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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차렷, 충성!

흔히 남자들은 말을 한다. 제대만 해봐라, 내 그럼 다시는 부대 쪽 산천으로는 오줌 한 방울도 아니 싸리라 -

왜 그런 말들을 하는 걸까. 이해가 가지 않는 나는 사단장 정신교육을 마친 연병장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모든 공식적 전역 행사가 마쳐진 것이다. 방금 전의 그 단결 구호, 현역병 시절의 그 마지막 경례구호를 끝으로 나는 이제 예비군의 신분이 되고 있었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우두커니 선 내 눈앞으로 군용 트럭들이 주르르 열을 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안에는 경외감을 지닌 채 나를 바라보는 얼굴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호기심과 겁이 반반씩 섞인 얼굴들. 나는 그들의 모표에 아무 것도 붙어있지 않다는 걸 볼 수 있었다. 보나마나 이제야 이곳 사단본부로 자대 배치를 받아온 신병들이었다. 한 사람이 나가면 그 자리를 채울 한 사람이 어김없이 들어오는 것, 그것이 바로 이런 군대라는 곳의 철칙이었다.

"아따, 안 됐다. 아그들아!"

왠지 씁슬한 내 곁에서 히히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 병장이었다. 소속부대에서 유일하게 나와 함께 전역하는 동기, 그가 호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찍찍 침을 뱉고 있었다.

나는 행여나 싶어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빨 새로 한 번 더 침을 내쏘며 그가 핀잔을 주고 있었다.

"큭큭… 뭘 그렇게 쫀다냐. 인자 우리는 민간인인디."

머쓱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의 말이 맞기는 맞았다. 입수보행을 해도, 이렇게 내놓고 담배를 펴도, 지금부터는 아무에게서도 눈치를 받지 않는다. 나는 그 새로운 사실이 무척이나 신기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다시금 주변을 휘 둘러보는 나였다. 예비군 마크를 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아련한 아쉬움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어쩌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올 수 없으리라. 이 연병장, 이 막사, 그리고 2년 가까이 박박 기며 돌아다닌 이곳의 산천들… 그런 생각에 엊그제만 해도 지겹던 풍경들이 새삼 그리움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박 병장과 나는 천천히 사단본부의 위병소를 통과했다. 이곳에서 시외버스만 잡아타면 그와 나는 곧장 집 앞으로 돌아가게 될 길이었다.

"창희 너는 뭐할거여?"

"나…?"

"아 참, 니는 대학생이었제. 그라믄 다시 학교 댕기면 되겄구만."

학교라. 왠지 아직은 어색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우리 대학교, 어차피 얼마 후 복학하게 되겠지만 고졸 출신인 박 병장은 나와는 처지가 조금 달랐다.

"에구… 난 뭘해야 할지 모르겄네. 고향 집 농삿일이나 도와야 할텡께."

그에게 나는 슬그머니 웃어보였다. 신병시절 얼빵한 성격으로 일찌감치 고문관으로 찍힌 탓에 애꿎은 동기인 나까지도 왕왕 고생시켰던 그였으나, 어차피 함께 그 긴 시절 동고동락을 해왔던 셈이었으니 나로서는 그에게 적잖은 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판에 나도 서울 올라가서 장사나 해볼까나, 하는 그의 푸념을 듣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요란한 클랙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생소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박 병장과 나인데, 순간 기대치 못하던 목소리가 나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있었다.

"야, 짱이야!"

짱이 - 이럴 수가. 대번에 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나는 뛸듯한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를 그렇게 부를 녀석은 이 세상에 단 한 놈만이 유일한 까닭이었다.

으리으리한 검은 색 세단, 그 옆에서 선글래스까지 낀 그 녀석이 나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마치 홍콩영화의 한 장면처럼 두 팔을 벌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우하하하. 여기 이짱님이 납시셨다."

"임마… 너, 네가 어떻게?"

우리는 서로를 반갑게 부둥켜안았다. 희창이였다.

"짜식, 오늘 제대하는 날인 걸 어떻게 알았어?"

"어쭈… 내가 모르는 게 어딨냐? 어머님께 전화해서 미리 다 알아놨지. 근데 창희 너 군기 봐라, 고참한테 경례도 안해?"

"하하, 웃기고 있네. 공익 주제에 어디서 똥폼은."

그랬다. 외아들 희창이는 나보다도 서너 달이나 늦게 입대를 해서 벌써 일 년 전에 제대, 아니 소집해제를 당해 있었다. 생각도 못했던 차에 마중을 나와준 녀석을 보니 어쨌든 나로서는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워매… 차 징허게 좋네?"

등뒤에서 들려온 그 부러워하는 목소리에 그제야 나는 희창이와 잠시 어깨동무를 풀었다. 멍하니 선 박 병장이 휘둥그래진 눈으로 나와 희창이, 그리고 대형 승용차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남발하고 있었다.

"어… 희창아, 인사해라. 나랑 같은 부대에서 제대하게 된 동기야."

안녕하십니까, 희창이가 인사를 건네자 어이구 안녕하시당가요, 라며 어색하게 허리마저 굽신거리는 박 병장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의 그에게는 이 최전방까지 번지르르한 양복 차림으로 고급 승용차를 몰고 나타난 희창이 녀석이 어쩐지 어마어마한 인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가자. 민간인 창희!"

희창이가 차 문을 열며 권했다. 나는 눈만 꿈벅거리는 박 병장을 돌아보았다.

"박 병장 이리 와. 서울 가서 기차 탈 거라고 했지? 같이 가자."

"어휴, 괜찮해… 내 주제에 무슨. 근디 창희 너 서울서 대단한 인물인갑네? 저렇게 근사한 으리으리한 사람이 다 나와있는 걸 보니께."

"하하, 아니야. 그냥 내 불알친구야. 그러지 말고 함께 타자구."

하지만 내 거듭된 청에도 박 병장은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그저 자기 신분엔 버스가 제격이라며 그는 굳이 동행을 고사하고 있었다.

"그럼… 언제 서울 올라오면 꼭 연락이라도 줘. 내 연락처 적었지?"

그래서 결국 그와 나는 미리 교환해둔 연락처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는 작별을 고해야 했다. 내가 차에 오르자 마자 희창이는 차를 출발시켰고, 나로서는 멀어져 가는 그의 모습이 사라질 무렵까지 손을 흔들어주는 게 전부였다.

얼마간 서먹한 기분을 정리한 나는 희창이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운전석이 아닌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앞자리에는 마찬가지로 반듯한 양복차림의 한 사내가 대신 운전을 하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근사한 차로 바꾼 거야? 그 스포츠카는 어쩌구?"

"아, 그거… 뭐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그나저나 인사해라. 상진이 형이라고, 내 일 좀 도와주는 분이셔."

상진이 형. 그것은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이름이었다. 내가 백미러를 통해 인사를 건네자 그가 마주 눈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어림잡아 희창이나 나보다 서너 살 위로 보이는 그는 다소 작은 눈을 제외하고 호남 형의 멀쑥한 인상이었다.

"창희 너 어디로 가고 싶냐?"

"어디라니?"

희창이가 내 무릎을 토닥거렸다. 입대 전 학창시절과 달리 좀더 호리호리해진 녀석이었어도 예의 그 장난기 가득한 미소만은 여전히 얼굴에 가득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의 둘도 없는 친구인 네 녀석 제댓날 아니냐. 이렇게 보낼 수야 없잖아? 말만 해라. 오늘 너 완전히 홍콩 보내줄 코스로 쫘악 안내를 할게."

홍콩 보내줄 코스? 나는 그의 허풍에 피식거리고 말았다. 아무리 군대를 다녀오고 몇 살을 더 먹었다지만 희창이 녀석의 이 호탕한 성격만큼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일단 우리 집으로 데려다 줘. 제대 인사는 드려야지."

"오케이. 역시 예의 바른 놈이다, 너는."

희창이는 앞좌석의 상진이 형이라는 사람에게 우리 집이 있는 강북을 댔다. 경쾌하게 속력을 내기 시작한 차 안에서 그는 문득 생각난 양 물었다.

"근데 선영이 누나는 너 오늘 제대란 거 아냐?"

선영이 누나. 학교 선배이자 두 살 연상인 나의 연인. 아직도 가슴 설레이는 그녀의 이름에 내게서는 작은 혼자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마 알 거야. 지난 주 편지에 그렇게 썼으니까."

"그래? 그러고 보니 나도 제수씨 얼굴 본 게 한참일세… 너도 그렇지? 작년 여름방학이던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타지에 멀리 떨어진지라 어느덧 반 년 이상이나 우리는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위로하듯 희창이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래도 넌 참 행운이다. 군대에 있던 너나 유학 가 있는 선영 선배나 그 덕분에 서로 믿을 수 있었잖아."

녀석에게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적어도 나는 선영이 누나와 헤어지리란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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