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혼
1화
웹소설 작가 - 유은정
본문
태연의 방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던 현민은 뭔가 결심한 듯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나갈 거야?”
“응.”
현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돌아 온 건 한치 망설임 없는 태연의 단호한 대답이었다.
“짐은 언제 다 싸 놨대……”
현관 앞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태연의 커다란 짐 가방들을 슬쩍 본 현민은 작게 투덜거렸다.
“왜,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아니이..나가기 전에 밥이라도 같이 한끼 먹을 수 있는 거 잖아아…”
어린아이 투정부리듯 말꼬리를 길게 끄는 현민의 말투에 태연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띠어졌다.
태연이 보기에 현민은 일부러 부리는 애교가 아닌 몸에 배어 있는 선천적인 애교가 참 많은 사람이었다.
태연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걸 본 현민은 이를 놓치지 않고 태연의 팔을 슬쩍 잡았다.
“저녁 같이 먹고 내가 데려다줄게. 응?”
그런 현민의 행동에 태연은 하마터면 그래, 하고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곧 올라갔던 입꼬리를 제자리로 하고 표정을 굳혔다.
“어차피 헤어질 건데 뭐하러.”
“…뭐?”
태연의 말에 내내 빵싯 올라가 있던 현민의 봉긋한 광대도 제자리를 찾았다.
“다음에 먹자. 밥은.”
“언제?”
“…언제든.”
“이래 놓고선 또 연락 안 하려고 그러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현민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태연은 서둘러 짐 가방을 챙겨 현관을 나섰다.
“갈게.”
닫히는 문 사이로 보이는 현민의 표정이 태연의 발목을 잡았지만, 태연은 그대로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 날, 결혼한 지 1년 되는 날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태연은 그 날 이후, 현민과 연락을 끊었다.
*
“남자 주인공이 누구라고요?”
“백..현민.”
그런데 지금 그 사람이랑 뭘 하라고?
“내가 아는 그 백현민이요?”
태연은 매니저 호영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경악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
“..응.”
다시 한 번 확인 시켜 주는 호영의 대답에 태연은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전화 좀 하고 올게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들고나온 태연은 망설이고 망설이다 1년 동안 누르지 않았던 번호를 눌렀다.
[어, 누나.]
1년 만에 하는 통화지만 마치 어제 통화한 듯, 아니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전화를 받는 현민의 목소리가 태연은 오늘따라 얄밉게만 느껴졌다.
“나 이 드라마 꼭 하고 싶어.”
[해, 하면 되지. 같이.]
“같이? 말이 돼?”
[말이 안 될 건 또 뭐야.]
“이 드라마 장르가 뭔 줄 알아?”
[로맨스.]
“근데 그걸 너랑 나랑 하자고?”
[응!]
“네가 포기해.”
[나는 이거 드라마 데뷔작인데?]
“다른 거 해. 너는 다른 거 충분히 할 수 있잖아.”
[나도 이 감독님 드라마 너무 하고 싶었거든.]
“야…너 진짜 이럴 거야?”
[몰라, 난 포기 안 해. 절대.]
“….그럼 내가 포기하지 뭐.”
[뭐? 야, 누나.]
“네가 포기 안 하면 내가 해야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그럼 넌 내 얼굴 보고 사랑한다느니 뭐 그런 말 할 수 있어?”
[어.]
“어?”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리 둘이 하는 걸로 해.]
단호한 말과 함께 뚝 하고 끊긴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던 태연은 몰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주물 거리며 회의실 문을 열었다.
가라앉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태연의 눈치를 살피던 호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태연아.”
“네.”
“이 드라마 너랑 백현민이 하는 걸로 확정됐어.”
호영은 테이블 위에 있는 노트북 화면을 태연 쪽으로 돌려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허..”
호영이 보여 준 노트북 화면 가득히 뜬 기사엔 태연과 현민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고 ‘백현민♡은태연. 박성호 감독 신작 ‘두 번째 사랑.’ 남녀 주인공으로 확정.’이라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
“무슨 좋은 일 있어?”
전화통화를 마친 후부터 계속 피식피식 웃는 현민의 모습에 현민의 매니저이자 동생인 현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있지, 좋은 일.”
“아…형수, 아니 은태연씨랑 드라마 찍기로 한 거 때문에?”
“어, 뭐 그것도 그렇고.”
“그렇게 좋아?”
“좋지. 이제 매일 얼굴 볼 수 있는데.”
오랜만에 보는 현민의 밝은 모습에 동생인 현호 역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카메라 앞에서는 한없이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지만, 카메라가 꺼지고 무대에서 내려오면 현민은 웃질 않았다.
태연과의 드라마 촬영이 확정된 후부터 계속 웃고 있는 제 형을 보며 현호는 이젠 예전 밝은 현민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을 가졌다.
***
“오빠는 여기 있어요.”
자신의 회사 앞에 도착한 태연은 매니저인 호영도 두고 혼자 대표실로 향했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태연은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하는 비서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곤 문을 두드려 주겠다는 비서 대신 온갖 감정을 담아 대표실 문을 쿵쿵 두드렸다.
“네, 들어오..”
들어 오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표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태연의 모습에 청하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던 서류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대표님!”
“왜.”
“이 기사 뭐예요.”
태연이 자신의 드라마 확정 기사가 뜬 휴대폰을 청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
“나 정말 백현민이랑 드라마 해요? 아니 해야 해요?”
“이 드라마 박성호 감독 작품인 건 알지.”
“…….”
“지금 너한테 그것보다 중요한 게 또 있어?”
정곡을 찌르는 청하의 말에 태연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혀 아무 대꾸도 못 했다.
“무명 배우한테 온 천금 같은 기회를 백현민 때문에 날릴 거야?”
“아니, 대표님…그게 백현민은…”
“전 남편이라서 불편하다?”
“….그렇죠.”
“너희 둘이 정말 사랑해서 한 결혼 아니잖아.”
“..네.”
“그러면 별 상관없는 거 아냐?”
“……”
맞는 말이었다. 자신과 현민은 애초부터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었고 아니 결혼식만 작게 올렸을 뿐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함께 살았고, 나름 부부처럼 지냈는데…
“백현민한테 감정 같은 거 있었니?”
“……”
청하의 물음에 태연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태연아.”
“..네.”
“너 언제까지 무명 배우 생활할 거야.”
아픈 곳만 쿡쿡 찌르는 청하의 말에 태연은 입술만 꾹 말았다.
“이제 너도 유명해져야지.”
“……”
“할 거지?”
“…네.”
그제야 태연은 느꼈다. 자신에게는 아무 결정권이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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