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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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승의 화실

짐승의 화실

1화

웹소설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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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제 앞에서 벗어 줄래요?

쿵. 쿵. 쿵. 쿵.

무대를 울리는 북소리는 그녀의 심장에 마약과 같은 흥분을 퍼트리고 그 주체할 수 없는 전율을 온몸으로 저들에게 표출하라 말했다.

음악이 시작되면, 그녀의 하얗고 예쁜 발은 조심스레 무대를 쓸어 내리고, 우아하게 휘어진 허리는 천천히 돌아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동시에 고개를 떨구며, 어릴 적 소풍 가기 전날의 소녀처럼 설레는 표정을 지은 그녀는 가볍게 발을 굴러 정적과 쾌락이 가득한 허공에 온몸을 맡긴다. 포근히 안아주는 느낌. 흥분에 몸부림치는 두 다리는 서로 교차하며 날갯짓을 하고 곧이어 땅으로 가볍고 아름답게 착지했다. 몇 초간의 정적 후, 그녀는 자신의 뒤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기대와 흥분에 답하듯 백조처럼 허리를 천천히 돌려 몸을 펼쳤다.

서서히 조명은 꺼지고, 공연장을 가득 채우던 음악은 어느새 사라졌다.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공연장에 태양이 이글거리듯 다시 한 번 모든 조명이 환하게 빛났다. 1시간 넘게 펼쳐진 정아의 열정적인 무대에 보답하듯, 무대 위로 연분홍 튤립 한 다발이 던져졌다. 그다음은 함성과 함께 새빨간 장미 10송이. 또 박수와 함께 해바라기 3송이. 정아는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눈에 비친 광경은 무대로 인해 공허해진 그녀의 마음을 한껏 채워 주기엔 충분했다. 무대에는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는 향기로운 화원이 이루어져 있었고, 그 자리를 지키며 아름답게 빛나는 한 명의 여왕이 서 있었다.

정아는 그녀에게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손 키스를 했다. 그리고 자리를 뜨지 않고 그 떨림을 즐기기 시작했다. 춤을 추며 무대라는 곳에 서 보지 않으면 평생을 느낄 수 없을, 신이 오직 그녀에게만 허락한 이 감정을 잊지 않으려고 정아는 느끼고 또 느꼈다.

김정아. 25살의 촉망받는 현대 무용수. 젊고 예쁘며, 대한민국 여성들의 워너비로 꼽히는 여자.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예술가이며, 그녀만을 바라보는 능력 있고 멋진 남자친구까지 가지고 있다. 정아는 더이상 바랄 것이 없지만, 하나 소원이 있다면, 이 행복하고 완전한 삶이 절대 사라지지 않고 그녀와 평생을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녀는 무대 뒤의 대기실로 향했다. 그러자 멀리서 여러 명의 지인이 그녀를 반기러 다가왔다. 고생했어, 수고했어. 라는 차가운 형식적인 인사로 머리를 가득 채우던 중 누군가가 뒤에서 따뜻한 코트를 그녀의 어깨에 덮어줬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묻지 않아도 정아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인 걸 알 수 있었다.

유민은 정아에게 푸른 장미 100송이를 안겨주며 너무 아름다운 공연이었다고 그녀의 두 눈을 보며 말했다. 진심이든 아니든 정아는 이 남자에게 사랑받는 것은 무대 위의 그것처럼 황홀한 기분이라고 느꼈다.

지인들과의 인사를 마친 둘은 유민의 차로 향했다.

정아

“바쁜데 어떻게 온 거야…”

유민

“아무리 바빠도 오빠가 너 공연 하는 데 빠질 수 없잖아.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건 정아 너 인걸.”

정아

“………헤…”

차 안에서 그 둘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유민이 얼마나 바쁜지 아는 정아는 감사의 선물로 그의 볼에 수줍게 키스했다.

“쪽.”

정아

“고마워. 내 공연 보러 와줘서..”

유민

“……………”

정아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키스해주면 좋아서 얼굴이 붉어지던 유민인데. 오늘따라 표정이 다른 듯 느꼈다. 아니, 굉장히 사납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숨소리 또한 거칠게 느껴졌고..

말없이 유민은 차를 몰아 한강 주차장으로 향했다. 정아는 유민의 계획에 없던 행동에 의아해졌다.

정아

“오빠. 여긴 왜 온 거야? 나랑 근사한 식사하러 가기로 했잖아.”

유민

“…………식사는 할 거야. 그전에 정아한테 할 말이 있어.”

정아

“…..뭔데?”

유민

“여기 기억나? 이곳 한강 주차장에서 우리 처음 사귀기로 했잖아.”

정아

“……..당연히 기억나지. 그게 어떤 날인데. 오빠가 수줍게 고백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정아는 그때의 설레던 추억에 잠시 웃음을 지었으나 이내 곧바로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 밤에 여기까지 데려왔고 처음 사귀던 그 날의 얘기를 꺼내는지… 그녀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몇 초의 정적이 흐른 후, 유민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유민

“정아야. 오빠 회사가 이번 투자진행이 굉장히 성공적이었어. 올해 3분기부터는 해외진출도 가능할 거 같아. 앞으로는 대한민국 시장이 아닌 전 세계 시장으로 영역을 넓힐 계획이고, 포털 사이트로는 독보적이면서도 경쟁 상대가 없는 회사를 운영하고 싶어.”

정아

“…….잘됐다. 오빠. 너무 좋은 소식인데?? 그럼 이제 회사도 유명해지고 진짜 꿈을 이루는 거네?”

유민

“응…….그렇지.”

정아

“그런데 왜 이리 표정이 안 좋아? 평소라면 기뻐하며 날 안아줄 텐데…”

평소와는 다르게 긴장한 듯 떨고 있는 남자 친구의 모습에 정아는 자신도 모르게 표정관리가 힘들어졌다.

유민

“내가 훗날 큰 기업의 CEO가 된 모습을 상상해봤는데….. 그때의 내 옆에도…”

정아

“……………….”

유민

“그때의 내 옆에도… 정아가 있었으면 좋겠어.”

정아는 유민의 떨리는 얘기를 듣자마자 이것이 프러포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유는 유민의 손에 들려진 빛나는 다이아 반지가 그녀를 향해 빛나고 있었기 때문. 그녀는 문득 남자 친구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30살에 부끄러워 사람들 없는 곳에서 프러포즈했으니.

5년간 유민과 교제하며 그의 인성이나, 성격, 능력, 외모 면에서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단 걸 이미 충분히 몸과 눈으로 느낀 그녀였기에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IT 기업의 젊은 이사와 실력 있는 현대 무용수와의 만남. 정아는 아름답고 그 무엇보다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평생을 누군가와 함께 한다니 겁도 나는 그녀였지만, 언제나 바라던 소망이었기에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정아

“좋아.”

유민

“응….? 정말?.. “

정아

“좋다 구… 여자 손을 부끄럽게 할 거야?”

유민

“….허…”

정아는 자신의 손에 딱 맞는 반지를 보자 눈물을 흘렸다. 유민과 사귀며 크게 싸운 적도 없었는데 왠지 눈물이 흘렀다. 왜일까. 그때는 그 눈물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정아

“나…꼭 행복하게 해줘야 해.”

유민

“최선을 다해 사랑할게. 정아야.”

묘한 분위기 속에서 둘은 서로의 눈을 응시하다 유민의 키스를 시작했다.

정아

“오빠…. 밖에서 누가 보지 않을까..”

유민

“이 주위에는 우리밖에 없어. 걱정마, 아무도 안 올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민은 거칠게 정아를 밀어붙였다.

***

정아는 신촌 가로수 길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걸었다. 그러자 과거에 향수에 취한 듯 자신도 모르게 유민과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5년 전, 무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며 수줍은 모습으로 이곳 가로수 길에서 데이트 신청을 하던 유민의 앳된 모습.

단정한 머리에 사슴같이 크고 맑은 눈, 뽀얗고 작은 얼굴에 순수한 표정으로 자신의 번호를 원하던 모습에 정아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한눈에 받았고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을 때, 행복해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정아는 자신이 섣부른 결정을 한 게 아닌가 하고 잠깐 서서 고민을 했지만, 답은 역시 유민에게 자신을 맡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휘 이 잉”

근처에 있는 택시정류장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정아의 뒤로 알 수 없는 써늘한 바람이 그녀의 귀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천천히 소름을 돋게 했다. 그리고 곧 그녀가 들어서는 안될, 차라리 두 손으로 귀를 막았어야 했을… 자신의 삶을 통째로 앗아갈 그 소리를 정아는 듣고 말았다.

시우

“저기요.”

굵고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와 정 없는 차가우면서도 여유로운 말투는 정아에게 차원이 다른 느낌을 안겨줬다. 그녀는 소름이 돋아 뻣뻣해진 목을 천천히 돌려 자신을 부른 존재를 확인했다.

정아

“………!!!!!!!!!!!”

소름 그 자체. 자신을 부른 남성은 키가 족히 187cm은 되보였고 무표정 같기도 살짝 웃는 모습 같기도 한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시우

“부탁이 있어요.”

정아

“무….무슨 부탁인데요?”

시우

“흠…..”

낯선 남자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살면서 그녀가 들을 수 있는 소리 중 가장 최악의 말을 뱉었다.

시우

“제 앞에서 벗어 볼래요?”

정아는 요근래 자꾸만 알 수 없는 불길한 감정이 왜 자신에게 느껴졌던 건지 단번에 알 수 있었고, 그 감정의 원인은 그녀 손에 들려 있던 커피로 코트를 적시는데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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