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랄히 다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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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랄히 다정하게

악랄히 다정하게

1화

웹소설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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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솔고등학교 전교 1등. 늘 나경의 뒤에 붙는 수식어였다.

남들은 그런 나경을 늘 대단하다며 치켜세워줬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녀는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늘 가난에 허덕여 미래를 장담할 수 없던 나경에게 전교 1등 타이틀은 절대 놓쳐선 안 될 끈과 같았다.

1등에게만 주어지는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나경은 대학에 발도 들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늘 나경은 공부했다.

밥을 먹는 시간을 쪼개서, 잠을 자는 시간을 줄여서, 알바 쉬는 시간을 문제집에 쏟으며.

그렇게 나경은 이번 시험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생각했다.

나경

"1등이... 바뀌어요?"

담임

"수학선생님이 실수를 하셔서. 자, 봐."

교무실에 불려 온 오늘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담임

"27번 문제 정답이 바뀌었어. 2번에서 4번으로. 넌 2번에 체크했던데."

나경의 시선이 담임이 건네온 시험지를 향했다.

담임

"하필이면 27번 문제만 틀렸던 애가 만점자가 돼서."

나경

"그러면..."

담임

"1등이 그 학생으로 바뀌었어. 유감스럽네."

나경

"장학금은요? 그건 어떻게 되는 건데요?"

담임

"1등이 바뀌었으니 바뀐 1등한테 가겠지."

나경

"그럼 저는요...?"

담임

"왜 이래. 알잖아. 2등한테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지."

나경

"..."

담임

"수업 시작하겠네. 그만 가보렴."

댕- 댕-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그럼에도 나경은 발자국을 뗄 수 없었다.

나경

"선생님. 아시잖아요. 제가 그 장학금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담임

"그럼 어떡하니. 유일그룹에선 전교 1등한테 장학금 주라는 조건을 이미 내걸어놨는데."

나경

"그래서 더 죽자 살자 공부하신거! 아시잖아요!"

담임

"너 꼭 내가 너 틀리라고 고사라도 지낸 것처럼 말한다?"

나경

"그게 아니라요! 아무리 그래도 장학금까지 바뀌는건,"

담임

"정 그럼 바뀐 1등 찾아가 보던지."

나경

"네?"

담임

"딱한 네 사정 들으면, 누가 알아? 장학금은 양보할지. 보니까 집안에 여유가 꽤 있는 아이 같던데."

이미 1등은 바뀌었다. 어쨌든 나경은 문제 하나를 틀렸고 내놓은 결과를 돌이킬 수 없다.

나경

"누군데요? 바뀐 1등이."

담임

"어디 보자...."

일주일. 장학금을 받는단 확신과 드디어 대학을 갈 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은지 딱 일주일이 되던 때였다.

담임

"어, 이 아이야."

한 남자아이의 사진에 올라간 선생의 손가락질로 거지같은 사건이 시작되었다.

태열

"미쳤어? 내가 싫다고 했지. 약혼 따위 안한다고!"

미진

[그건 네 선택이 아니라고 했을 텐데.]

점심시간, 텅 빈 복도 끝.

창가에 몸을 기댄 태열이 전화 속 들려오는 목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새엄마, 미진이었다.

미진

[오늘 밤 8시, 오로라 호텔 레스토랑이야. 처음 양가 어른들 모이는 자리니까 늦지 말고. 깔끔하게 하고 오는거 잊지 말고.]

태열

"내가 순순히 나갈 것 같아?"

미진

[안 나오면. 네가 어떡할 건데. 설마 회장님 뜻을 거스르려는 거니?]

태열이 말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미진

[그러게 내가 늘 말했지. 행동 조심하라고. 너 같으면 스무살 넘어서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을 가만두고 보겠니?]

태열

"언제부터 그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았어?"

미진

[정 싫으면 클럽에서 같이 있던 그 여자라도 데려오라니까?]

태열

"장난해?"

미진

[뭐가 장난이야? 진심인데. 둘이 키스해서 신문 1면에 난 건 장난이 아니고, 내가 그 여자 데려오라는 건 장난 같니?]

- 유일그룹 장남 강태열, 낯선 여자와 클럽에서 밀회! -

오늘 신문 1면에 뜬 태열의 기사였다.

기사를 본 태열의 아버지, 강회장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리고 최후의 수단으로 태열을 억지로 거래처 딸과 약혼시키기로 해버렸다.

태열

"이 기자들을 진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태열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미진

[왜. 못 데려오겠니?]

태열

"..."

미진

[하긴. 너랑 약혼한다는 여자가 세상에 있겠니?]

태열

"...뭐?"

미진

[그게 미친 짓이지.]

태열

"미친 짓?"

미진

[그래. 미친 짓. 세상에 어떤 여자가 너 같은 놈을 뭘 믿고 약혼을 하겠어?]

미진의 말이 태열의 신경을 자극시켰다.

태열

"그럼 내가 그 미친 짓을 하면 어떡할 건데."

미진

[뭐?]

태열

"나랑 약혼하겠다는 여자를 데려가면 어떡할 거냐고."

미진

[허! 있기는 하고?]

태열

"그러니까. 어떡할 거냐고."

미진

[뭘 바라는데?]

태열

"나야 뭐 하나밖에 없지."

짧은 정적이 흘렀다.

수화기 너머 미진의 숨소리가 가늘게 떨려옴이 느껴졌다.

미진

[그래, 좋아.]

태열

"뭘?"

미진

[나가줄게.]

태열

"..."

미진

[이 집에서. 대신,]

태열

"...?"

미진

[내가 이기면 네가 떠나. 영원히 이 한국에서.]

태열

"아주 벼르고 있었나 봐? 내가 집에서 나가기를."

미진

[너도 마찬가지 아냐?]

미진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어쨌든 두 사람의 원하는 바는 같았다.

내기에서 진 사람이 저택을 떠나는 것.

태열이 더 이상 토 달지 않고 마저 미진의 말을 기다렸다.

미진

[그럼 이따 8시에 봐. 미친 짓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뚝,

비웃음이 가득한 미진의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태열이 걸음을 옮기며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

나경

"저기."

태열

"...?"

그때 누군가 태열의 곁으로 다가왔다.

단정한 교복 차림에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 그리고 새침한 얼굴.

왼쪽 가슴에 정갈하게 명찰을 단 나경이었다.

태열

"뭐야?"

나경

"아, 그 선생님 말씀 듣고 왔는데... "

나경이 망설이며 태열의 왼쪽 가슴에 시선을 옮겼다.

나경

"명찰 좀 달고 다니지..."

하지만 교무실에서 담임이 출석부에서 집었던 1등의 얼굴과 태열의 얼굴은 같았다.

나경

"근데 뭐... 얼굴이 똑같으니까 맞겠지."

나경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나경

"일단 축하해."

태열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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