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최고급 맨션.
세련되고 깔끔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집의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바닥에는 옷가지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양말과 바지, 재킷과 와이셔츠는 물론 남자의 속옷까지……. 그 옆에 엎어지듯 놓여 있는 원피스와 속옷의 자태는 두 남녀가 얼마가 급했는지를 실감하게 했다.
“흐음.”
이불을 걷어내려 하자 이불 속 또 다른 손이 그녀의 가슴을 휘감았다.
‘뭐지? 뭐가 이렇게 몽글몽글하게 느껴지는 거야?’
여자는 제 가슴을 밀가루 반죽하듯 주무르고 있는 손의 정체를 아직 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뭔가 찌릿한 전기가 온몸에 퍼지듯 전해졌고 입술은 자연스럽게 U자로 벌어졌다.
“좋다. 하응.”
제 가슴을 스스로 만지는 것보다 더 황홀한 기분이 드는 건 타인의 손이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커다랗고 묵직한 것이 다리 사이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뭔가 뜨겁고 단단했다.
‘뭐지. 이게?’
여자는 저도 모르게 그 정체 모를 것에 손을 댔다. 그 순간,
『거기, 그렇게 꼭 잡고 있으면 위험할 텐데…….』
남자는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건넸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중저음의 달콤한 목소리였다. 귀에 대고 바람을 불어넣은 것처럼 달달했다.
“뭐야. 나 라디오 틀고 잤나?”
손끝에서 뭔가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내 것도 아닌 그것은 몹시 단단하게 커져 있었다. 여자는 너무 놀라 손을 휘저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까악! 당신 누구야?』
분명 낯선 집이 아니었다. 이곳은 내 집인데…….준희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이 현실이 꿈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제 볼을 살짝 꼬집어보았지만, 무척이나 아팠다.
『일어났어요?』
준희의 목소리에 눈을 뜬 남자는 기다란 속눈썹을 끔뻑였다.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호통을 친 건 아니었지만, 그의 눈빛은 충분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누구냐고요. 설마, 강도? 도둑? 아니면 내 스토커?』
“한국말로 하죠. 우리.”
“하, 한국사람?”
준희는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미쳤나 봐. 나, 원나잇을 한 거야? 저건 또 뭐야? 기차야?’
제 침대 바닥에 널브러진 옷들이 그래 보였다.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정리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표정 짓지 말죠.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한 것 같잖아요.”
남자는 꽤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준희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잔뜩 끌어안고 침대 끝으로 가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럼, 우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준희의 말에 남자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와 여자가 이렇게 벌거벗고 누워있는데 무슨 일이 없었겠어요?”
남자는 매끈하고 탄탄한 근육을 일으키며 자리에 앉았다. 이내 자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매만지며 크게 호흡을 내뱉었다.
“네? 지금 저 놀리시는 건가요?”
준희는 어안이 벙벙했다.
“놀리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그쪽이랑 나. 상상하는 그런 건 없었지만…….”
“없었지만 뭐요?”
“그 비슷한 건…….”
준희는 남자의 말에 사고가 정지되었다. 잠은 자지 않았는데 그와 비슷한 걸 했다면, 서로 물고, 빨고, 만지고 그랬다는 거?
“구체적으로 말해줘요?”
남자의 말에 순간, 준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네? 아니요. 딱 거기까지. 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요.”
알긴 뭘 알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파티에 참석했다는 것밖에는…….
‘그래서 내가 술 안 먹는다고 버텼던 건데.’
준희는 어제의 일을 하나씩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기억이 싹둑 잘려나간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은 불쾌하네요.”
“네? 뭐라고 하셨어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미소를 잔뜩 머금은 해사한 얼굴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제가 그쪽을 유혹해서 벌인 일처럼 말하니까 말이죠. 만일 여기가 내 집이었다면 그쪽이 나한테 화를 내거나 당황해도 할 말이 없지만, 여긴 보시다시피 그쪽 집이 아닌가요?”
그 말인즉,
“설마, 내가 당신을 유혹했다는 건가요?”
준희는 눈을 크게 뜨며 속으로 아닐거야를 연발하며 물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집에서 같이 잘래요?’라고 말했죠.”
Oh, my God! 준희는 그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 말대로 여기 이 집으로 왔는데…….”
남자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요?”
“당신은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나한테 달려들어 키스했고 저는 뜨거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키스를 받아들였어요. 그다음에는…….”
“그 다음?”
뭐가 또 있나요? 준희는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 다음엔 우린, 서로의 옷을 벗겼죠.”
꿀꺽. 마른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이건 마치 다른 여자와의 정사를 낱낱이 공개해 달라고 떼를 쓰는 것 같지 않은가. 상상력이 동원되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우린 침대에 누웠는데…….”
남자는 준희의 그런 마음을 알 리 없었다.
“아. 알았어요. 제가 그랬네요. 아하핫. 맞아요. 제가 그랬던 것 같아요. 더 얘기하면 서로 곤란해질 것 같네요. 하하하.”
준희는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어쩌면 그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CCTV를 돌려봐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든 사람이 잘못이지.
“그 다음 얘기를 할 참인데.”
“아니요. 안하셔도 알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뭐라고요?”
“제가 술에 취해 실수한 것 같아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찌 되었건 제가 당신을 유혹해서 우리 집에 끌어들였다는 건 사실인 것 같으니까요. 제가 강도니 도둑이니 스토커니 하는 말로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이불을 끌어안은 채 준희가 꾸벅 인사를 건넸다.
“죄송하다. 그걸로 끝인가요?”
남자는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준희를 바라보았다.
“그럼 뭐가 남았나요?”
준희의 말에 남자는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을 정색하며 말을 꺼냈다.
“표정을 보니,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나 보군요.”
“…….”
“어제의 뜨거웠던 우리 밤이 그 쪽에게는 술에 취해 벌어진 사고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걸 알았으니, 이 몸은 이만 사라져야겠네요. 욕실 좀 쓸게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하체를 가리고 있던 새하얀 이불이 벗겨지자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실제 눈앞에서 본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남자는 준희를 살짝 의식하는 듯 머뭇거리다가 이내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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