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위기에 취한 밤
쏴아. 쏴아.
온 세상이 흠뻑 젖을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 은영은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길을 걸었다. 오가는 사람이 없으니, 창피할 것도 없다. 뺨에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궁금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리에 무거운 쇳덩어리가 놓인 것처럼 몹시 무겁게 발을 당겼다.
“하……. 지금 나, 뭐 하고 있는 거지?”
연신 쏟아지는 빗속을 걷고 걷던 은영은 문득 길에 멈춰 섰다. 어질해진 발걸음처럼 정신이 혼란해져갔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이모가 걱정하실 텐데…….”
물에 빠진 고양이 꼴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일단 젖은 옷을 말릴 곳이 필요했다. 당연하다는 듯 은영이 회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몸을 피하고 의지할 곳이 회사뿐이라는 사실에 서글퍼졌다.
“여은영. 어떻게 넌 이런 날 전화할 친구조차 없니? 인생 헛살았어.”
인기척 하나 없는 캄캄한 복도 끝에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커졌다. 이 소리라도 들리지 않으면 어둠에 잡아먹힐 것 같이 갑갑한 공기가 그녀를 휘감았다. 매끈하게 뻗은 다리가 저릿해졌다.
“아얏. 아파라.”
뒤꿈치가 까진 줄도 몰랐다. 하이힐을 벗은 채 손에 들었다. 여기서부터 기획실까지 조금만 걸으면 된다. 지친 다리로 겨우 사무실 문을 연 은영은 이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다른 부서 사람들도 퇴근한 후였다. 불을 켜고 싶었지만, 그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겨우 휴대폰으로 플래시를 켰다.
잠시 창문 밖에 시선을 두던 은영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직도 정신이 얼얼하기만 했다.
“나 정말 그 사람이랑 헤어진 건가?”
그래. 정말 헤어졌어. 우리. 완전히, 제대로 헤어진 거야. 묻고 또 물어도 결과는 같았다.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빼서 한 모금 마시던 은영은 반쯤 열려 있는 이사실에 눈길을 보냈다.
“아, 안쪽 창고에 히터가 있지.”
담요까지 꺼낸 은영은 책상 옆에 놓인 플러그에 전기 히터의 코드를 꼽았다. 한참을 기다리자 몸이 한결 따뜻해졌다. 젖은 옷을 말리려고 치마와 블라우스를 벗고 담요로 몸을 감쌌다. 적막한 공간에 혼자 있으려니 어쩐지 무섭기도 했다. 휴대폰을 들어 음악을 켰다.
출장 간 사이에 이사실은 창고로 변한 것 같았다. 마치 이삿짐을 연상케 하는 상자들과 가방이 수두룩했지만 은영의 눈에 보이는 건 냉장고였다.
“무슨 짐이 이렇게……. 우와, 와인 냉장고다”
투명한 냉장고에는 와인과 음료수가 잔뜩 들어 있었다.
“무슨 와인이 이렇게 많아?”
새빨간 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한 병쯤이야. 티도 나지 않겠지. 알코올이 들어가면 열이 나서 좀 나아질 것 같았다. 마개를 감싸고 있던 금박지를 벗겨내자 손으로 돌려 딸 수 있는 뚜껑이 보였다.
“하나만 실례할게요.”
그 말을 한 탓일까. 미안한 마음이 사그라졌다. 꿀꺽. 시뻘건 액체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생각보다 쓰지 않고 달달했다. 알싸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자꾸만 끌렸다. 점점 과감하게 병나발을 분 채 몸을 흐느적거렸다. 음악은 신이 났지만, 마음은 그 반대였다.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을 떨치기 위해 더욱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어차피 여긴 혼자잖아.
***
매캐하며 짙고 무거운 냄새가 와인에서 흘러나오는 향과 함께 어우러져 공간을 가득 채웠다.
찰칵.
사무실 밖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은영은 휴대폰에서 나오는 음악에 이미 취한 상태였다. 은영은 담요를 몸에 걸친 채 몸을 흐느적거렸다.
“이 와인, 은근히 맛있네. 자꾸 들어가.”
술이 약한 은영은 겁도 없이 또다시 벌컥벌컥 음료수를 마시듯 와인을 들이켰다.
“거기, 누구시죠?”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은영이 채 넘기지도 못한 술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켁. 켁. 네? 그쪽은 누구신데요?”
고개를 홱 돌려 사람을 확인하던 은영은 암벽처럼 거대한 그림자를 보며 되물었다.
“제 물음에 먼저 대답을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은영은 휴대폰으로 남자의 얼굴을 비추어보았다.
“저는 여기 직원이에요.”
“직원이요?”
남자는 짧게 말했지만 왜 그러고 있냐는 뜻이었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은영이 화들짝 놀라 담요로 몸을 더욱 감쌌다.
“옷 좀 말리려고요. 비에 젖었거든요.”
“이 사실에 옷을 말리려고 왔다는 걸 지금 믿으라는 건가요? 산업 스파이는 아니겠죠?”
“믿건 믿지 않건, 그건 그쪽 자유지만 산업스파이라니요. 아니거든요.”
은영은 버럭 대들었다. 이 남자가 누구인 줄도 모르겠고. 머리는 빙글빙글 돌고 점점 몸이 뜨거워졌다.
“와인까지…….”
남자는 낮게 탄식했다. 아차. 순식간에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온 터라 채 숨기지 못했다. 회사에서 술을 마신 직원에 대한 항의 글이 게시판에 올라오는 건 아니겠지.
“이건 그냥……비가 많이 와서 잠깐 젖은 옷을 말리러 들어온 거예요.”
와인에 대해 물었는데 은영은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문득 제 모습이 남자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상상이 갔다. 미친 여자가 밤에 사무실에서 옷을 홀딱 벗고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겠지. 그 순간, 남자가 불을 켜려고 스위치에 손을 댔다.
“잠시만이요. 불 켜지 말아주세요!”
은영이 가늘게 소리쳤다.
“불을 켜지 말라니……. 뭐 훔쳐간 건 없는지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도둑 아니고 여기 직원이라니까요.”
“그건 확인해 보면 알겠죠.”
“그럼 딱 3분만 기다려요. 옷 좀 입을게요. 뒤돌아서세요.”
“3분이면 됩니까?”
“뒤돌아 있으라고요. 남 옷 입는 거 구경하게요?”
“나 참, 알았어요. 빨리 입기나 해요.”
젠장. 망했다. 망했어. 왜 이런 모습을 낯선 사람에게 보인 거야. 왜. 은영은 재빨리 젖어 있는 블라우스와 치마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정 못 믿겠으면 사원카드라도 보여줄게요.”
옷을 입으며 은영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강조하는 걸 보니 직원인 것 맞는 것 같군요. 입구 보안장치를 뚫고 들어왔을 리는 없으니까요.”
“그쪽도 여기 직원인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이 늦은 시간에 오신 거죠?”
“그런 것을 물을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다 됐나요?”
채 마르지 않은 옷이 몸에 닿자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다른 직원한테 걸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휴일에 누가 회사에 온단 말인가. 제정신이 아닌 나 빼고. 어느 부서 누구인지 알아두는 게 나을 것 같았지만 머리가 점점 어지러웠다.
미친 듯이 퍼부었던 비가 어느새 그쳤고 말간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였을까? 달빛에 반사된 남자의 뺨이 몹시도 고와 보였다. 여자가 화장을 곱게 하고 조명을 받으면 달라 보인다는데 남자도 그런 것일까? 게다가 그가 눈을 끔뻑일 때마다 팔랑거리는 기다란 속눈썹이 아름답게 보였다. 멋쩍은 듯 두리번거릴 때 움직이는 도톰한 입술은 뭘 발랐는지 촉촉해보였다. 뭐가 이렇게 현실감이 없는 거지? 저 남자, 귀신인가.
“그냥, 오늘 일 못 본 척하고 지나가주면 안되겠어요?”
“못 본 척 해 달라?”
“그래주시면 좋겠어요.”
“여기가 호텔도 아니고, 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거 그쪽 상사도 압니까? 게다가 회사에서 술을 마시는 건 좀 곤란한 일 같은데요.”
“정말 죄송해요. 갈 곳이 여기밖에 없었어요.”
멋대로 휘젓고 다닌다는 말에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남자의 말이 맞았다. 여기가 호텔도 아니고,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이상하겠지. 그렇지만 오늘, 엄청난 이별을 맛본 은영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징계를 받게 될 수도 있어요.”
남자의 말투는 무척이나 날이 섰다. 절대 봐주지 않을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 낯선 얼굴을 보니 타 부서 사람 같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하는 회사이니 제 부서 사람이 아니면 얼굴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 부서 사람도 아니면서 참견은……. 그래. 모르겠다. 나도 이제.
“회사를 위해서 죽어라 일만 했던 나한테 징계를 내린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사표 쓰겠어요.”
왜 내 시간을 방해한 거냐고 투정부리는 아이처럼 입술을 쭉 내밀었다가 그대로 와인 병에 댔다.
“그만하죠. 많이 마신 것 같은데.”
남자가 다가와 와인 병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과 그의 손이 순간 스쳤다. 은영의 얼굴을 빤히 보던 남자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주세요. 마저 마시고 갈 거니까.”
은영은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혼자가 좋았는데, 아무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고독을 즐겼는데…….
“이렇게, 회사에서 술까지 마시고 혼자 있는 건 대단한 일이 있었다는 건데, 무슨 일인데 비까지 맞고 이러고 있는 거죠?”
“그쪽이 알 바 아니죠.”
“내 알 바 아닌 것 맞지만 적어도 변명은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모습으로 상사의 방을 침범했는데.”
은영은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듣고 싶어요?”
“무슨 큰 충격 받을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그래요. 말해줄게요. 어차피, 난 내일 사표를 낼 거고, 당신을 다시 보지 않을 거니까.”
“…….”
“제가요. 오늘 애인을 만나러 갔거든요? 근데, 다른 여자랑 호텔에 들어가는 걸 봤어요. 그래서 붙잡았죠. 지금 뭐하는 거냐고. 이 여자 누구냐고. 그랬더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하더라고요.”
“이런, 최악이네요.”
그가 정말 안타까워서 한 말인지 약을 올리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은영은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맞아요. 최악이었어요. 애인이 뭐예요?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이잖아요. 그럼 난 애인 아니고 뭔데요? 정말 화가 나고 억울하고 속상했는데, 제대로 말도 못하고 돌아서서 왔어요.”
“…….”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어요. 성공하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어요. 그래야 그 사람과 내가 꿈꾸는 미래에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난요. 결혼을 빨리하고 싶어요. 그래서 아이도 빨리 낳고 싶고요. 단란하게 내 가정을 꾸리며 사는 거. 그걸 바랐거든요. 그 사람이랑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일에 매달린 건데.”
은영은 그렇게 말하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두서없이 터져 나오는 그녀의 말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얘기를 들어주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 그의 표정이 어떤지 보이지 않았다.
“일 잘하는 여자, 매력 있는데……. 그래서 차인 겁니까? 너무 일만 해서?”
“누가 차여요. 내가 찼어요.”
차였다는 말에 은영이 버럭 했다. 사실은 그의 말이 맞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요?”
“그 사람도 바쁘고 나도 바쁘고. 우린 서로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그래서 내가 싫다나, 뭐라나. 이젠 설레지 않는다나, 뭐라나. 곧 결혼하자고 그런 말을 듣게 될 줄 알았는데 헤어지자니. 나 참.”
점점 서러움이 끌어 올랐다.
“…….”
“난요. 꽤 잘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공부도 엄청 열심히 했고 회사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고……. 사랑 역시 정말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난 뭐든 잘 배우고 금방 익히니까요. 그런데 너무 자만했나 봐요. 사랑에 실패하고만 패배자가 되어버렸어요.”
은영은 다시 와인 병을 들고 꿀꺽 꿀꺽 들이켰다. 점점 온몸이 뜨거워진다. 알코올이 피를 타고 온몸에 퍼지는 것 같았다.
“앞으로 실패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다른 사랑을 만나면 더 잘하겠죠. 뭐든 잘 배우고 금방 익힌다면서요.”
마치 아이를 다루듯 어르는 말투에 정이 묻어났다. 그래서였을까. 자꾸만 속 얘기를 꺼내놓게 된다.
“다른 남자를 만나도 똑같을 걸요. 사랑은 너무 어려워요. 이러다가 이별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아파할 것 같고…….”
은영은 낙담하며 말을 꺼냈다. 서툴고 어설퍼서 연애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사람을 이용해 봐요. 이별 후유증은 다른 사람으로 잊는 겁니다.”
“뭘 이용하라고요? 그쪽이요?”
남자의 말에 은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하. 날 이용하라는 말로 들렸어요? 뭐, 그것도 나쁘지 않죠. 오늘 하루만큼은 사람이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어요.”
“네?”
화악. 얼굴이 새빨개졌다. 위로라는 말이 그런 뜻이 아닌데도, 야한 생각이 자꾸 몰려들었다.
“진심인데. 서로 나쁠 것 없잖아요.”
과연, 저 남자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투명하게 속이 훤히 비추는 가면을 쓴 것처럼 속을 들킨 기분이 들었다. 이별 후유증 따위는 없을 줄 알았는데, 마음이 몹시 아팠다. 오늘은 정말 이 아픈 마음을 달래 줄 수만 있다면 뭐라고 하고 싶었다.
“일단, 난 그쪽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게다가 위로를 어떻게 해 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말이죠…….”
“그럼, 이건 어때요?”
순간, 남자가 은영의 앞에 다가왔다.
“네? 으흡.”
그의 목덜미에 코와 입술이 닿았다. 매끄러운 접촉에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당겼지만 역부족이었다. 잔뜩 힘이 실린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단단하게 떠받히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위로를 해주려는 듯 더욱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하아, 이게 무슨 짓이죠?”
은영의 입술이 달싹 움직였다. 낯선 남자에게 빼앗긴 키스에 화가 나야 하는데 왜 정신이 몽롱해지는 걸까. 더 이상한 건 그의 키스가 너무도 달콤했다는 것이다. 입에 머금고 있던 와인보다 더 달았다.
“그 눈빛 때문이에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래로 내리깔던 눈동자가 위로 솟구쳤다.
“당신이 날 필요로 하는 것 같아서…….”
선명하고 또렷한 갈색의 눈동자가 점점 다가온다.
“내 키스가 싫으면 날 밀어내요.”
은영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그의 눈동자가 너무도 깊어서…….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그 속에 빠져들 것 같았다. 다시 살짝 아래로 눈동자를 내리깔자 그가 나지막이 숨을 내뱉었다. 그의 숨이 인중에 와 닿았다. 솜털이 쭈뼛 서더니 이내 입술에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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